#1 서사극(epic theater)
표현주의뿐 아니라 서사극 역시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서사극으로 가장 유명한 극작가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로, 그는 희곡에 관한 이론으로 유명하다. 브레히트는 연극은 연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국 연극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신만의 서사극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작품은 삽화식 구성으로 장소가 자주 전환되고, 플롯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서사극의 목적은 교육에 있다고 믿었다. 관객들을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변화를 보이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연극이 사회 변화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연극이 교훈을 주는 데 성공하려면 관객들을 최면 걸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연극에 반대해야 했다. 따라서 작품이 관객들을 연극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연극 속 사건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하면 그들이 무대 위에서 본 것을 생각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관객들은 자신들이 극장에 있고, 연극을 관람 중이라는 사실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종종 해설자가 등장하여 연극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무대 장치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눈에 잘 보이도록 설치하기도 했다. 브레히트가 사용한 또 하나의 서사적 기법은 각 장면이 공연되기 전에 제목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앞으로 전개될 사건과 줄거리를 알려서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또 극 중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를 설명해 주는 노래들이 많이 나온다. 노래는 대부분 내용을 전달하기보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곤 했다.
#2 전쟁 중 유럽과 영국의 연극
프랑스의 연극 비평가였던 '자크 코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대본 중심의 연극을 주장했다. 연극이 외적인 장식이나 장치들보다는 극 자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포는 배우의 연기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대본의 강조, 대본 탐구를 위한 즉흥 연기, 앙상블 연기, 가면 작업, 공감하는 연극 등의 내용으로 연기 훈련법을 확립시켰다. 그는 배우와 관객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없애기 위해 프로시니엄 아치가 없는 빈 무대로 디자인하고, 장소의 구분을 위해 간단한 스크린과 조명을 이용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절묘하고 서정적인 언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희곡은 스페인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불행과 어두운 면모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는 정부의 후원을 받는 극단에서 스페인의 고전극을 주로 상연했다. 고전극의 영향을 받은 그는 스페인 전통의 줄거리와 주제, 등장인물을 바탕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창작하여 자신의 희곡을 반전시켰다. 이런 민속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피의 결혼식'으로 강인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써서 그녀의 욕망이 그녀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환경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여줬다. 그의 작품은 권력이나 폭력으로 국민들을 꼼짝 못 하게 한 당시 스페인의 자멸 과정이라고 해석되곤 한다.
이탈리아의 극작가인 '루이지 피란델로'는 세계 대전 중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창적인 극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피란델로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주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며,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진실의 상대성, 허구의 역할 등에 관련된 철학과 미학의 많은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매우 뛰어난 극적 장치를 사용했고, 전통적인 극적 구조의 결속력을 파괴하고 작품 자체에 관심을 집중해주길 원했다. 피란델로의 작품들처럼 그의 삶과 커리어 이탈리아와 유럽의 이론적, 사회적, 정치적 보편성을 반영한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였던 '그란빌-바커'는 셰익스피어 무대화에 독특한 접근법으로 유명했다. 그는 희곡 본래의 것에 충실하고 희곡의 시가 살아있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연기를 공연의 중심적인 요소로 여겼으며, 그의 연극은 간소하고 암시적이었으며 무대 의상은 세부적이지 않았다.
#3 전체주의 시대의 연극
당연하게도 전체주의는 유럽의 연극과 희곡의 발전의 길을 가로막았다. 연극은 선동의 도구로 이용되어 대부분의 표현과 실험이 억압당하고 통제받았다. 소련은 연극의 선동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알고서는 많은 볼거리와 야외 행사들을 개최했다. 희곡들은 사실주의 양식으로 써야 했고 명확한 사회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는데 이러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유일하게 연극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허용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극작가들의 작품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고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나치가 통치하던 독일에서도 유사한 연극적 형식이 지원받았고, 나치를 찬양하는 수많은 멜로드라마 공연되었다. 독일의 수많은 연극 예술가들도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그들의 종교 정치관으로 발목 잡혀 망명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연극으로 한 걸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연극의 다양한 방향성과 연극 조합들 (0) | 2023.02.28 |
---|---|
미국 연극, 상업 연극의 시대가 열리고 사라지는 과정 (0) | 2023.02.27 |
세계대전, 불안과 혼돈의 시대 속 연극 (0) | 2023.02.24 |
19세기 말, 반사실주의 운동의 시작점 (0) | 2023.02.23 |
19세기 말,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연극 (0) | 2023.02.23 |
댓글